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한국군 (문단 편집) === [[한미관계]]와 한국의 안보적 측면 === >한국 정부가 요구한 것은 단지 ‘돈’만은 아니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에서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자동 개입 조항을 넣어줄 것, 주한미군의 [[소파#s-4|주둔군 지위 협정]]을 맺어줄 것, 그리고 주한미군 감축을 중지해줄 것 등을 요청했다. 이는 [[1953년]] 정전협정 후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미국에 요구했던 숙원 사업이었다. > >존슨 행정부의 대답은 자동 개입 조항은 불가, 주둔군 지위 협정은 [[필리핀]] 수준으로 가능, 주한미군 감축 시 한국 정부에 사전 협의 가능이었다. 한국 정부로서는 더 이상의 양보를 받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미국의 대한 원조를 더 보상받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국 정부가 꺼낸 카드는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수출 물량을 늘려주는 것이었다. >---- >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4215.html#csidxa1835dbf574d20d9c7e3255c980b2fc|한겨레, 파병군은 박정희에게 '알라딘의 램프'였나]] 이제는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베트남전에 투입된 병력과 전비는 상상을 초월했다. 전쟁 중에 미국 행정부가 교체되면서 후임 국방장관이 확인해 본 바에 따르면, 미 행정부는 의회 승인 없이 유럽 주둔군 등 타 지역에 투입되어야 할 물자와 자금까지 베트남에 쏟아부었다. 한마디로 한가하게 한국 사정 봐 줄 시기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한국군 일부가 가지 않았다면, 미군이 더 많이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주한미군]]의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한번 빠져나간 병력이 다시 돌아온 적은 없었다. 즉 주한 미군의 베트남 이동을 막기 위해 한국이 선제적으로 파병을 미국에 제안했다고도 볼 수 있다. > '''파병하는 경우의 이점''' >1. 미국이 원하는 대로 무조건 순종하기 때문에 미국의 호감을 살 수 있음. > 2. 월남 수호 문제를 한국의 국방과 결부시킬 수 있음. 만약에 미국이 월남을 포기하는 경우, 미국의 아세아전략에 변경을 초래하여 한국수호의 의욕이 감퇴될 우려가 있음. > 3. 국내적으로 반공의식이 약화되고 반공구호가 실감을 잃고 있는 현재, 월남에 파병한다는 것은 공산주의를 구체적인 적으로 설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국내적 단결과 반공의식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 4. 파병은 아세아 반공국가의 결속에 박차를 가하게 될 것임. >---- > '''월남파병문제'에서 고려되어야 할 문제점'' > 대통령비서실 문서, 보고번호 65, 제7호, 1964년 1월 6일, 박태균(2000: 47) 당시 대통령 비서실에서 작성된 문서를 살펴보면 베트남 파병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초기 의도는 미국과의 관계와 한국의 국방을 주로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 또한 3차 파병까지는 한국 정부의 파견 목적이 군사적 목적에 집중돼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반면, 최근 공개된 자료에서는 한국 정부가 경제적 목적이 더 컸음을 밝히는 연구들도 나오고 있다.][*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갈등하는 동맹(서울: 역사비평사, 2010), 48-49p] 국내 여론 역시 비전투병 파견인 1차 파병 당시에 특히나 파병에 우호적이었고 베트남전에 대한 위기의식 또한 존재했다. 당시 베트남전에 대한 구호는 '월남 전선은 휴전선의 연장'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가 밀던 [[도미노]] 효과에 근거한 구호인데, '남베트남이 공산화되면 한국도 무사하지 못하다'라는 뜻과 '베트남전은 6.25전쟁의 평행적인 연장'이라는 두 가지 논리를 담고 있다. [[베트남 공화국]]의 막장스러운 실상은 미국이나 한국 정부조차 알 수 없던 시절이었고 불과 10년 전에 [[6.25 전쟁]]을 겪은 한국 국민에게 이런 파병을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당시의 남베트남 정부는 한국과 서로 [[대사관]]을 두고 [[반공]]을 표방하던 우방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6.25 전쟁]] 당시 [[유엔군사령부|유엔군]]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 한국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남베트남인들을 북베트남 공산도당에게 핍박당하는 선량한 민주주의자로 보았다. 10여 년 전에 '''자신들 스스로가 북한에 당해봤으니''' 안 그러는 게 이상한 것. 따라서 "미국이 우리를 [[6.25 전쟁]] 때 도와줬으니 이제 우리도 미국을 도와주자" 또는 "이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를 공산주의자의 야욕으로부터 지켜주자!"라는 주장이 자연스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밑에서 서술하겠지만, 이후 파병이 이루어졌던 1970년대에는 국민들의 이데올로기적 반감에 의해서만 파병의 정당성을 가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단적인 예로 1차 파병 당시 파병동의안은 국회를 거쳤었는데 [[만장일치]] 로 통과되었다. 당시 여야 간에 비상계엄 해제가 합의됨에 따라 원래 험악했던 국회 분위기가 크게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민정당]]의 [[황인원]]은 자유우방의 월남이 공산 세력의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지원하는 것이 당연하며, 6.25 전쟁 때 각국이 지원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소위 '의리론'이라고 불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